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널드 레이건 (문단 편집) === 대처와의 비교 === [[파일:external/resources0.news.com.au/614988-ronald-reagan-with-margaret-thatcher-in-1982.jpg]] [[신자유주의]]의 서막을 여는 지도자로서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서로 많이 비교된다. 비슷한 시기 영국의 마거릿 대처가 호감도와 평가가 지역, 계층, 성향에 따라 너무 극명하고 극단적으로 갈리는 데 비하면, 레이건은 물론 정치인으로서의 평가는 갈리긴 하지만 '개인'으로서의 호감도와 [[인기]]는 전반적으로 높은 편이다. 워낙 대외적으로 원숙하고 위트있는 이미지를 구축했기에,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정치적인 평가와는 별개로 레이건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호감을 보이는 Reagan Democrat라 불리우는 이들이 적지 않다. 영국은 상원 선거를 따로 치르지 않고, 하원의 권한이 막강하다 보니 마거릿 대처가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고 업무를 수행했던 데 반해, 당시 레이건 정권은 상원은 공화당이 장악했긴 했지만[* 이후 1986년 중간 선거에서는 뒤집혔다.] 하원은 민주당이 우세였기에[* 미국 하원은 1954년부터 1994년까지 민주당이 40년간 계속 다수당을 지켜 왔다. 1900년대 중반부터 민주당이 점점 진보화되면서 공화당 텃밭이던 북부로 진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반대로 보수화되면서 민주당 텃밭이었던 남부로 진출하기 시작했지만, 이 과정이 민주당보다는 조금 늦었기 때문에 서로의 텃밭이 뒤바뀌는 이 기간 동안은 민주당이 새로운 텃밭이 되어 가던 북부+기존에 남아있던 남부 기반(일명 [[딕시크랫]])을 바탕 삼아 하원만큼은 굳건히 지켜 왔다.] 정책 수행에 견제를 받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대처보다는 온건했다. 실제로 레이건은 당시 민주당 출신 팁 오닐 하원의장과 수시로 전화 통화 및 대화를 하였고 야당인 민주당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대화하는 자세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재치있는 언변과 훌륭한 연설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정책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능숙한 대화와 소통의 자세를 보였다. 또한 [[챌린저호 폭발사고]] 당시에 당일에 사고로 충격을 받은 미국 국민들에게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감동적인 명연설을 하여 큰 지지를 받기도 했다. 또한 한국 입장에서는 레이건은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에 압력을 행사하여 군사력 투입을 막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측면이 매우 크다. 이 점에서 오히려 인권 외교를 내세우면서도 [[5.18 민주화운동]]에서 [[신군부]]를 억제하지 못해 참극을 초래했던 [[지미 카터]]보다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아무튼 레이건의 평가가 보다 긍정적인 것은 전임자인 [[지미 카터]]가 자신의 편협한 사상에 기초한 독설을 미국 국민들에게 퍼부어서 질리게 만들었던 것도 있고 역시 카터가 임명한 [[폴 볼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유임시켜 고금리정책을 집행해서 실업률이 초기에 상승하긴 했지만, 부실기업들의 구조조정을 통해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국가경제의 경쟁력을 높였기 때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